홍헌선생과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생가. (사진=화성시SNS시민홍보단 정찬송)
홍헌선생과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생가. (사진=화성시SNS시민홍보단 정찬송)

[수원일보=이수원 기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인 이상화는 나라를 잃어버린 한과 식민 치하의 암울하고 억눌리고 가난한 인민의 삶이 절절하게 녹아든 절창을 피어린 들판에 흩뿌렸다.

시인 이상화는 이 노래를 1926년 ‘개벽(開闢)’ 6월호에 발표했다.

이 시가 발표되기 6년 하고 9개월 전인 1919년 봄, 3.1만세운동의 바람은 온 나라에 들불처럼 번져갔고 마침내 화성 송산면, 마도면, 서신면 일대에도 광풍 같은 만세운동의 열기가 번졌다.

1919년 3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의사 안중근이 여순 감옥에서 일제에 의해 사형을 당한 바로 그 날, 지금의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 사강 장터에서도 독립만세 운동의 함성이 우렁차게 터져 나왔다.

홍면(홍면옥) 등 지역의 독립만세 운동 지도자들의 주도하에 펼쳐진 만세운동은 약 150여명의 군중이 모여 3,1 독립선언서가 표방한 것처럼 자긍심 높은 기개로 평화롭게 전개됐다.

그리고 이틀 뒤인 3월 28일 사강 장날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은 500여명으로 늘어났다. 당황한 일본경찰은 시위 주동자인 홍면 등 2-3명을 주재소로 끌고 가려다 강력하게 저항하는 군중들에게 제지를 당했다. ‘삼류시민’인 소위 ‘조센징’들이 자신들을 막아서는 것을 우습게 여기고 강하게 겁박하려고 시위자들의 대표격인 홍면의 어깨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홍면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놀라고 분노한 군중들은 일시에 일본경찰들을 덮쳤다. 이 기세에 놀란 일본경찰들이 자전거를 타고 주재소로 도망을 쳤으나, 죽음마저 불사하고 달려든 군중들은 일본 순사부장 노구치 고주(野口廣三)를 잡아 사강리 장터로 끌고 가 돌과 몽둥이로 쳐 죽였다.

일제의 일본인 경찰순사부장의 지위는 지역의 황제 같은 지위라서 그의 죽음은 일경과 제국주의자들에게 말로 할 수 없는 공포, 그 이상이었다.

일제는 만세운동의 진압과 노구치의 죽음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을 위해 4월 12일 수원과 천안 철도원호대의 헌병 5명, 군인 7명과 무장한 일본 순사와 순사보들이 송산면, 서신면, 마도면 일대의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 구금하고 민가에 불을 질러서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이때 사강리, 봉가리, 삼존리, 육일리, 마산리, 중송리, 해문리, 상안리 주민들은 솥단지 하나 건지지 못하고 궁평리나 전곡리 바닷가 등으로 죽음을 피해 달아나야 했다.

집도 절도 없는 주민들, 눈뜨고 못 볼 참상을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 환란의 현장에 ‘홍헌’이라는 약관의 선비가 있었다.

서신면 전곡리에 사는 홍헌은 집안 소유의 산에 아름드리 소나무 등 재목감이 많은 것을 알고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산의 나무를 거저 줄 테니 베어다 속히 비바람 피할 집을 지으시오.” 라고.

홍헌 선생은 1898년 3월 5일 지금의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에서 태어났다.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에는 약관 20세에 불과했다.

이완용 등 친일 앞잡이들은 오직 자신들의 호의호식을 위해 부를 축적하기에 눈이 벌게져서 제 민족의 피와 살을 도리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런 때 홍헌 선생은 결연하게 자신의 산에 있던 쭉쭉 뻗은 아름드리 재목들을 아낌없이 처참한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의 피눈물을 닦아 주고 시린 등을 따듯하게 해주었다.

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일경들이 나서서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었던 것을 보면 일본에 반발하는 ‘불량선인’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극성스런 일경의 추적을 피해 홍헌 선생은 당시의 서울 경성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그 해 10월 말경 체포되어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아야 했다.

종로경찰서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온 홍헌 선생은 이듬해인 1920년 11월 4일 뼈를 부수는 악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푸른 나이 22세에 당항성 서쪽 전곡리 고향에서 생을 접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간이 길어지고 해방 뒤에도, 이어진 6.25 사변을 겪는 등 하루하루 사는 일이 절박했기에 독립에 헌신한 지사들을 잊고 각자가 제 삶 챙기기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흘렀어도 송산면 주민들은 일제 때 집을 지을 나무를 아낌없이 내어준 홍헌 선생의 업적을 잊지 않았다.

1977년의 3월 3일 주민들은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홍헌 선생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결초보은은 아니더라도 잊지 않고 새기는 송산면 주민들의 결 고운 마음이 크게 돋보이는 일이었다.

지금도 선생의 후손들은 송산면 사강리에서 주민들과 따뜻한 교감을 나누고 있다.

홍헌 선생의 손자 홍완유 선생은 내과의사로서 지역 환자들의 큰 위안이 되었고, 뒤를 이어 증손이신 홍사준 사강리 연세홍내과 원장은 지금도 홍헌 선생의 뜻을 면면히 지키며 지역의 환자를 돌보는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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